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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편



어렸을때 내가 크면 아버지의 저런 모습은 닮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보니 아버지와 그대로 닮아 있는 나를 본다. 

나의 그 싫은 모습을 아들에게는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 꽤 노력했다. 

그런데 희망과는 반대로 자라면서 나의 싫은 모습을 그대로 닮아 가는 子息을 본다. 


소심하다. 

겁도 많고 눈치도 많은 듯 하다.

오해받는 것을 참지못한다. 


항상 자기 방어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고집도 있는 듯하다. 

간섭도 많고 잔소리도 많아진다.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아빠를 닮아간다면 언젠가는 나타나게 될 것도 있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에 민감해한다.

보이지 않는 것에 관심이 있으나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장점보다는 단점을 잘 본다. 

분석과 통합을 좋아한다. 

말이 안되는 것을 참지 못한다.

이론이 서지 않는 것은 실천하기 힘들어 한다.

참여보다는 관찰을 좋아한다.

예민하다. 

조울이 있다.  

감정이 겉으로 그대로 나타난다. 

이성적인 논쟁에 약하다.

말보다는 글을 좋아한다.


내게는 없는 것이 아들에게 있다. 


소리와 리듬감이 좋다.

악기를 잘 다룬다. 

노래를 부르는 것도 좋아한다. 

공부를 싫어한다( 나도 처음부터 공부가 좋았던 것은 아닌 듯하다). 


유일하게 믿는 나의 힘이 있다. 


엉덩이가 무겁다. 

한번 시작하면 끈기있게 한다.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논리를 만들어서 自身을 이해시킨다. 

관심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힘이 좋다.


인생의 문제는 내 취향에 딱 맞는 문제이지만, 

불행히도 영원히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  

난 이것을 평생 놓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나의 아들을 생각하면, 

아무리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무엇인가에 갇힌 기분을 느낀다. 

이것이 "매트릭스인가"하는 기분이 들때도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고의 범위만으로는 안될 것 같은 한계를 가끔 느낀다. 

가끔 뫼비우스의 띠를 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의 아버지도 이런 한계를 느꼈을까? 

나의 아들도 나중에 이런 한계를 느끼게 될까?  

한계에 대한 절망감을 子息에게서 끊어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질문들이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한지 오래다. 


살아오면서 알게 된 지혜도 있다.  

세상에는 항상 양면이 있는 듯하다. 

장점에는 단점이 있고, 단점에는 장점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내 自身의 단점들이 없었다면, 내가 생각하는 유일한 장점은 없었을 것이다.

인생의 많은 선배들이 말했듯이, 인생의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었는지 우리의 논리와 사고로는 모두 파악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면 그 노력으로 결국에는 다른 대가가 있게 된다. 


그렇다면, 子息들의 인생을 바꾸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설령 부모가 원하는 것을 子息에게서 얻게 되더라도,

그로 인해서 다른 단점이 생기게 된다면...


장점과 단점들 사이에서 이것을 취하고 저것을 버리고,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일까?


답변편


子息의 인생은 子息의 인생일 수 밖에 없다. 

부모는 언젠가 떠날 것이고 혼자 남은 아이는 自身의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다. 

어디서 그랬듯이, 부모는 그저 子息을 바라봐주는 "유령"이 되어 줄 수 밖에 없다. 

부모가 할 일은 단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自身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싫어하는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내 子息을 싫어할 수는 없다. 

내가 사랑하는 子息이기 이전에

그것이 그의 삶이고, 그의 모습이다. 

있는 그대로 존중해줘야 한다. 


자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줘야 한다. 

自身을 사랑하지 못하는 부모에게서는 

自身을 사랑하지 못하는 子息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진실인 듯 하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이 바뀌는 것이 얼마나 힘들 일인가를 생각해 봤을때,

부모가 바뀌는 것 또한 그만큼 힘들 것이고, 

그렇다면 子息들을 自身이 원하는대로 교육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지를 상상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부모가 느끼는 한계가 그대로 子息에게 넘어가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일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내가 완전히 변해야 子息에게 끼치는 영향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이것이 되어야 저것이 되는" 그런 일방이 아닌 듯하다. 

인생은 이것과 저것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나선형으로 향상되는 것 같다. 

아직은 내가 부족하지만, 子息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그것이 부족한 내 自身을 변화시키는 힘이 될 수도 있다. 

子息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되고, 

나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깨닫게 되면 

그것으로 나의 생각에 영향을 주고 

그리고 나의 생각의 변화는 다시 子息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게 되는 듯 하다.  


중요한 것은 나의 모습과 아이의 모습을 바라볼 때

사랑을 가지고 보지 못하면

아이의 모습도 자신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자신이 싫어하는 점들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로서만 보이게 된다. 

아이를 기르는 방식이 어떤 식이어도 좋다.  

엄격한 훈육이어도 좋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모든 훈육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듯 하다. 


또한 부모 자신이 바뀌지 못하면서  

子息을 自身이 원하는대로 바꾸려고만 하는 것은 

그런 시도 자체만으로도 결국 

나의 한계가 그대로 子息에게 전달되는 지름길이 된다는 것이다.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한 날이다. 

이제는 다 커 버렸다. 


사랑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봐 주려고 노력해도 

때로는 잘 되지 않을때가 많다.  

힘들겠지만 노력해야 한다. 

子息을 위해서 부족한 나를 사랑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변하기까지 해야 한다. 


아이가 있는 그대로의 自身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면,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면,

自身의 행복과 다른 사람의 행복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기를 바란다면,

아이가 행복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면,

"나 하나쯤 사랑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모든 것은 부모 自身과 自身의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자신을 사랑스런 눈으로 볼 수 있어야

세상을 사랑스런 눈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되어야 아이를 사랑스런 눈으로 볼 수 있고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유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이면서, 

그것이 "유령"으로서의 부모가 할 유일한 역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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